[스크랩] "실제 사건 공부하니 어려운 법(法)도 쏙쏙"
"실제 사건 공부하니 어려운 법(法)도 쏙쏙"
서울 남대문中 사회 수업
"교과서 용어 달달 외워봐야 신문 제대로 읽는 것만 못해
새로 바뀐 입시제에도 강점" 10년 넘게 수업에 신문 활용
신문 앞에 앉은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표정은 마치 시험지를 대하듯 진지했다. 학생들은 한손에 빨간 펜을 들고 기사를 '사냥'하기 시작한다. "민법이냐 사법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중얼중얼 하면서 종합면과 사회면 기사들을 뒤적인다. 각종 사건·사고에 대해 소(訴)를 제기할 경우 민사(民事) 사안에 해당할 것이냐, 형사(刑事) 사안에 해당할 것이냐를 두고 판단하는 중이다. 즉 "민사는 개인과 개인, 형사는 국가와 개인의 분쟁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두 개념의 차이를 실제 사건을 통해 알아보는 중이다.
22일 오전 9시 55분 2교시 사회 시간. 수업이 시작되자 서울 남대문중학교(교장 한성룡) 2학년3반 학생 34명은 교과서 대신 신문을 펼쳤다. 이날 배울 해당 교과 단원은 중2 사회 교과서의 7단원 '사법의 의미와 기능'편. 이 과목 담당인 임하순(50·전국경제인연합회 체험경제교육교사연구회 부회장) 교사는 미리 준비해온 파일 '사법의 꿈, 신문에서 키워라'를 열고 학습 목표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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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일 오전 서울 남대문중 2학년3반 학생들이 사회 과목 시간에‘법’의 개념에 대해 신문 활용 수업을 받고 있다. 신문에서 사건을 찾아 민사사건인지 형사사건인지 구분하고, 근거와 의견을 달아보는 수업이다./유나니 기자 nani@chosun.com
"오늘의 학습 목표는 첫째, 사법의 의미를 말할 수 있다. 둘째, 민사재판과 형사재판을 이해하고 법 적용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1일자 신문에 신용카드사가 수수료를 많이 받는다는 기사가 났어요. 이와 관련해서 분쟁이 생기면 민사재판이 열릴까, 형사재판이 열릴까? 여러분이 판사라면 무슨 근거로 어떻게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 자, 지금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자. 신문에서 기사를 골라 분류해 보자."
곽현수 학생은 형사사건으로 '일출 명소 향일암 불타…방화 여부 수사'를 고르고 선생님이 나눠준 A4용지에 9줄로 기사를 정리했다. 유혁주 학생도 형사사건을 골랐다. '조례 고쳐서라도 전국 모든 학원 야간 수업 금지' 기사에 대해 "이를 어기면 국가가 나서서 처벌해야 할 것이므로 형사사건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판사는 처벌의 정도를 정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수업은 몇몇 학생들의 발표와 간단한 ○×퀴즈인 '아래 사건은 민사·형사 중 어떤 사건에 해당할까요?'로 마무리됐다.
"사례를 통한 개념 정리를 반복하니까 민사와 형사의 개념 하나는 확실히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죠."
임하순 교사는 벌써 10년 넘게 사회 수업에 신문을 활용해 오고 있다. 이 시간엔 신문이 주교재가 되고, 교과서가 부교재가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문을 주교재로 나눠주고 교과서는 교사가 해당 단원을 미리 '예습'해서 개념 정리를 도울 수 있도록 정리한 파일을 보여주는 형태다.
"교과서만 가지고 하면 용어를 달달 암기하는 것에 불과하고, 인터넷으로 개념 정리를 찾아봐도 컴퓨터를 끄는 순간 머리도 셧 다운(shut down)돼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신문에서 실제 사건을 이해하고 적용해 보면 오랫동안 아이들 머릿속에 기억되지요."
임 교사는 현행 개정 교육 과정에 따르기 위해선 더더욱 신문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2007년 개정 교육 과정 이후부터 중학교 사회 교과가 확 바뀌면서 더 심각해졌어요. 그전까지는 중3 교과서부터 나오던 '사법 개념의 이해'가 개정 후 중2 교과서로 들어오면서 기대 수준은 높아지고 학생들의 이해력은 더 떨어졌죠. 유명 참고서도 쉽지는 않았어요. 신문 기사를 인용해 설명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교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이 많아서 고달프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죠."
그는 45분의 수업을 위해 새벽부터 4~5시간을 준비한다고 했다. '늦어도 중학생 때부터는 어른 신문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특히 최근 입학사정관제 전형에 대한 관심이 중학교까지 확대되면서 통합 사고력을 측정하는 논·구술, 발표·토론 실력이 대학교뿐 아니라 고등학교 입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임 교사는 신문 교육의 효과를 확신하고 있다.
"한 자립형사립고의 올해 합격생 사례를 들어보면 NIE를 한 학생들과 토론대회에 나가 상을 받은 경험이 있는 학생들이 대거 합격했어요. 모두 신문에서 논리적 근거를 찾아온 풍부한 경험 덕분이죠."
비용면에서도 신문은 가장 저렴한 교재라는 사실이 부담감을 없앴다. "미술 준비물만 사려고 해도 1만~2만원인데, 신문 한 부는 600원만 투자하면 되니 얼마나 부담이 없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NIE 수업을 수행 평가에 반영한다. 내년에는 특기 적성시간에 NIE를 도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선생님의 말에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유호진 학생이 '부연설명'을 했다.
"조두순사건 때 신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단순히 '나쁜 놈이군' 하고 생각했을 텐데 여러 기사들을 읽다보니 우리나라 법 자체가 성폭력에 대해 너무 관대한 것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요?" <조선일보 2009.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