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리가 추구하는 인재像은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하는 인재像은 무엇인가
한국식 교육제도 '가벼움'과 '불안함'… 정권의 정책 목표 따라 바뀌는 大入
정보와 재화를 가진 쪽이 훨씬 유리, 인재상은 한 사회의 지향 가치 반영
교육제도, 대학의 수요·공급 아니라 어떤 인재를 만들 것인가 고민해야
-
박성희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요즘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미환수 추징금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좀 다르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0년 여름, 대입 제도가 바뀌었다는 뉴스를 석간신문을 통해 알고 황당해한 기억과 함께, 서릿발 같은 과외 금지 조치를 내린 대통령으로 기억 속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딸도 나와 같은 고 3이었는데, 그해 여름 주요 과목 과외를 모두 끝냈다는 미확인 소문이 돌았다.
제도의 가벼움과 불안함을 온몸으로 학습한 30여년 전 그 느낌이 요즘 되살아나고 있다. 바로 얼마 전, A형·B형 수준별 수능을 해독하느라 친구와 지인을 만나 열심히 귀동냥을 했는데, 내년부터는 그 제도가 없어진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이는 다음 학기 문과냐 이과냐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2017년 수능 개편안으로 문·이과 완전 융합형을 제시하면서 앞날이 혼미해졌다. 더구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한국사가 필수로 추가된다. "현재 고교 1학년생은 재수가 불가능해지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교육부 담당자는 "재수생 이상 응시자들을 위한 대책을 고민하겠다"고 답하고 있다. 제발 고민해 주었으면 좋겠다.
융합이 세계적 추세이다 보니 대입에서 문·이과 융합 논의는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인가. 광복 후 수십 번 바뀐 교육 제도를 거친 우리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이미 교차 지원에 따른 부작용을 경험한 적이 있고, 몇 년 지나면 아우성이 높아 또 바꿀 것이라고 어느 교육 전문가는 일갈한다.
수많은 변화의 터널에서 불안한 적응을 거듭하며 우리가 추구해온 인재상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제도가 바뀔 때마다 그 나름의 좋은 의도가 있었겠지만, 결국 선행 학습형, 경쟁형, 학업 위주형 인재가 우수 대학에 진학하는 틀은 바뀌지 않았다. 중·고등학교는 여전히 대입에 끌려다니느라 어수선하다. 청소년의 체력이나 문화 소양을 위한 교육적 배려가 턱없이 적고, 봉사 활동이나 인성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다.
제도는 그에 맞는 인간형을 양산한다. 바뀐 제도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서는 정보와 재화를 쥔 쪽이 훨씬 유리하다. 제도가 정보 지체와 양극화를 부추기는 셈이다. 복잡한 제도는 또 사람을 복잡하게 변형한다. 지식과 지략을 겸비한 융합형(?) 인재가 나오는 건 시간문제다. 학교에서 봉사를 형식적으로 다루면, 지도자가 돼서도 봉사를 장식품으로 여기기 쉽다.
산업화 시대의 인재상은 근면·성실하고 협동하는 인간이었다. 당시 급훈은 '성실' '하면 된다' 같은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요즘 급훈에는 '창의' '도전' '혁신' 같은 말이 많이 등장한다고 한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한 달 전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창조경제를 견인할 창의 인재 육성 방안'이 발표되었다. 창의적 무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다빈치 프로젝트 같은 멋진 표현이 들어 있었고, 꿈, 끼, 융합 전문, 도전, 글로벌, 평생 학습 역량을 강조하고 있었다. 학벌과 스펙이 아닌 꿈과 끼를 가진 창의 인재 양성에 정부 지원을 집중해 기존 공교육 체계를 변혁하겠다고 한다. 진짜 그렇게 되길 바란다. 문제는 다빈치형 인재가 육성되기 전에 이 정부는 임기가 다한다는 것이다. 언제 키워서 그들에게 창조경제를 견인하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재상이 다빈치형이라면, 그런 사람이 일류 대학에 가고 지도자가 되도록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한 사회가 지향하는 인재상은 그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관의 문제다. 정책 목표에 맞춘 인재가 아니라, 가치관에 기반을 둔 인재상을 정립하는 것에서부터 교육 문제를 풀어 가는 게 옳다. 명석한 두뇌와 바른 인성의 소유자가 좋은 학교에 가야 한다. 역사의식과 확고한 국가관을 가진 인재가 지도자로 성장해야 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재상에 대한 국민의 합의를 이끌고, 성공 가치관을 바로잡는 것만으로도 교육정책의 절반은 성공이다.
2017학년도부터는 대입 정원이 고등학교 졸업 정원을 초과하게 된다. 대학의 수요 공급 논리를 떠나 우리 사회를 이끌 인재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제도가 길러낸 바른 인물들이 국회에서, 정부에서, 기업에서 활약하며 후속 세대를 양성하는 선순환 구조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조선일보 201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