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이 쌓인 핫코다산은 스키어에게 천연 슬로프나 다름없다. 스키어 오른편 아오모리의 겨울을 상징하는 수빙(樹氷)이 더욱 극적인 풍경을 만든다.
눈보다 귀로 다가오는 여행지가 있다. 일본 아오모리(靑森)가 꼭 그렇다. 겨울이 되면 설국(雪國)으로 변하는 고요한 시골 마을에서 난생처음 눈 소리를 들었다. 사락사락 눈 쌓이는 소리,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는 설경보다 짙은 여운을 남겼다. 소리의 감동을 글로 담을 수 없어 단지 눈으로 본 아름다움을 부지런히 전한다.

(1) 아오모리에서만 탈 수 있는 스토브열차. 겨울이 되면 열차 안 석탄난로에 불을 댕긴다. (2) 해산물의 천국인 아오모리. 특히 가리비가 맛나기로 유명하다. (3) 아오모리 도와다현대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서 있는 여성(Standing woman)’. 실제 높이가 4m에 육박한다.
아무도 잠에서 깨지 않은 새벽녘인가. 아오모리는 서울과 시차라도 있는 듯했다. 벌써 정오가 지난 시간인데 시끌벅적함도, 번잡스러움도 없었다. 바쁜 것이라고는 오직 눈뿐이다. 이미 온 세상을 뒤덮고도 눈은 쉬는 법이 없었다. 대지에 하얀 생크림을 발라놓은 것 같다.
일본 최북단 섬 홋카이도(北海道)와 혼슈(本州)를 잇는 길목에 위치한 아오모리현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눈의 왕국이다. 시베리아에서 시작한 바람이 바다를 건너면서 잔뜩 수증기를 머금었다가 아오모리 고지대에 부딪히며 어마어마한 양의 눈을 쏟아낸다. 일본 최고 적설량(111㎝)과 최고 강설량(669㎝) 기록이 모두 아오모리에서 나왔다. 이번 겨울에도 어김없이 매달 2m가 넘는 눈이 내렸고, 어느새 사람 허리춤 언저리까지 쌓였다.
이 정도 눈에도 도시는 끄떡없다. 일찌감치 눈과 공존하는 법을 터득한 아오모리 주민의 지혜가 곳곳에서 반짝였다. 눈이 쌓이지 않도록 뾰족하게 만든 지붕이 그렇고, 눈에 파묻히지 않도록 계단 위에 설치한 공중전화 부스가 그랬다. 눈 무게에 짓눌리지 않게끔 모든 신호등은 세로형이고 주차장마다 설치된 호스에서는 뜨거운 물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수고스러워도 사람은 눈을 아낀다. 아오모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다하기에는 눈이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을 빚어낸다. 겨울 핫코다(八甲田·1584m) 산은 여기 아오모리 사람이 최고로 치는 장관이다. 산꼭대기를 등지고 서있는 ‘스노몬스터(snow monster)’ 때문이다. 스노몬스터는 수빙(樹氷)이라고도 불리는데 글자 그대로 얼어버린 나무다. 그 모습이 괴물과 같다고 해서 ‘몬스터’라는 이름이 붙었다.
등 뒤에서 불어오는 눈보라를 온몸으로 받아낸 나무는 하얀 갑옷을 둘렀다. 해발 1000m 이상 혹한의 고원에서 뿌리를 박고 살아가야 하는 침엽수의 모습이다. 꽁꽁 얼어붙은 수빙은 봄이 돼야 갑옷을 벗고 본래의 푸른 나무가 될 수 있다. 괴물이라고 부르기에는 가혹한 것 같다.
눈이 녹아내리기 전까지 수빙은 천연 슬로프의 천연 장애물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수분이 적고 입자가 고운 스노파우더(snow powder) 위로 스키어와 스노보더가 무심히 미끄러져 내려갔다.

열차로 도시 한 바퀴 … 객실엔 석탄난로
핫코다 산 정상에서 지상으로 연결되는 로프웨이(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 아오모리의 또 다른 명물 스토브열차를 타러 갔다. 아오모리 안에서만 운행하는 쓰가루철도(津<8EFD>鐵道)는 12개 역 사이를 왕복하는 완행열차다. 객실 안에 석탄난로가 설치돼 있어 스토브열차라는 애칭을 얻었다.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옛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일본 전역에서 사람이 몰려든다.
1930년 개통한 그때 그 모습을 간직한 쓰가루철도는, 말하자면 움직이는 사랑방이다. 기차 승무원이 불을 댕기니 승객들이 옹기종기 난로 곁으로 모여든다. 보기보다 화력이 세서 금세 객실 안이 훈훈하다. 주전부리를 가득 실은 카트가 반가웠다. 삶은 계란이 아닌 오징어와 찹쌀떡을 집었다. 난로에 노릇노릇 구워 먹으니 별미가 따로 없다. 난로는 다음달 31일 불씨가 꺼진다. 겨울이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내내 식어 있다가 ‘한여름의 스토브열차’ 체험일인 8월 4일 단 한 차례 켜진다.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 경험은 아오니온천(靑荷溫泉)에서도 이어졌다. 자동차를 타고 도심에서 20분 정도 이어진 산길을 지나 아오니 계곡에 다다랐다. 어둠 속에 작은 불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기 없이 기름 램프로만 어둠을 밝히는 ‘호롱불 온천’과의 첫 대면이었다.
온천탕에도 전깃불이 없다. 그윽한 불빛에 의지해 목욕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다다미방 내부도 전기 시설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TV나 컴퓨터는 무용지물이고 전파가 터지지 않아 휴대전화마저 먹통이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책을 펴 봐도 어둠 속에서 글자를 보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온천물에 몸을 담근 후라 노곤한데 잠도 안 왔다. 눈뜨고도 도대체 할 게 없다.